어떤 사람들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따라서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믿더라도 헛되이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헛된 믿음일까요?


야고보서 2장 14절~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며 그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3절~6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계명을 지키지 않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계명들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계명들을 지키셨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유월절, 초막절,오순절과 같은 계명을 지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마26/17, 눅4/16, 요7/2, 행2/1).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본 보여주신 대로 계명을 지켜 구원받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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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디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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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이 남 유다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남 유다까지 가야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의 마음이 남 유다의 왕에게 기울 것을 염려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가 아닌 곳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은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해 제사를 하며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갔습니다(열왕기상 12장 25절~33절). 여로보암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왕들도 여로보암의 선례를 따라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는데, 성경은 이를 '여로보암의 길', '여로보암의 죄'라 부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19절

이는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함을 인함이라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열왕기하 10장 29절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남 유다에서 다윗의 왕조가 계승되는 동안, 북 이스라엘에서는 반역자가 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반역의 역사가 수차례 되풀이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권력 다툼에만 관심을 두었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상 숭배를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합 왕은 왕비 이세벨과 함께 북 이스라엘 전체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의 나라로 만드는 죄악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두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열왕기상 16장 32절~33절, 열왕기상 18장 1절~19절)


이후에 등장하는 왕들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의 길로 나아갔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려 많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선지자들의 호소에도 북 이스라엘은 회개치 못하고 거듭하여 죄를 범하다가 결국 멸망을 당했습니다. 멸망당하기 직전, 남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오랜 세월 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다시 지키자고 북 이스라엘에 보발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이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역대하 30장 1절~10절). 하나님의 손길을 끝까지 거부한 북 이스라엘은 B.C 721년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을 당하고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열왕기하 18장 9절~12절

히스기야 왕 사년 곧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칠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삼 년 후에 그 성이 함락되니...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인들은 정책적으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대신 다른 민족들을 사마리아의 각 성에 살게 하였습니다(열왕기하 17장 24절). 그 결과 그 땅에 남아있던 백성들과 새로 이주해 온 이방 민족이 섞여 살면서 혼혈이 된 '사마리아인'이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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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디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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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이자 외교관, 정치가로도 잘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혹시 일하는 석공을 자세히 관찰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석공은 아마 똑같은 자리를 백 번은 족히 두드릴 것입니다. 갈라질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백한 번째 망치로 내리치면 돌은 갑자기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이는 한 번의 망치질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이 들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그런 어려움은 아름다운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그때가 바로 백 번째 망치질을 한 순간일지 모릅니다. 인내를 가지고 마지막 백한 번째 망치질을 하여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가 있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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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디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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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13장 10절을 인용하여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신약시대에는 사랑을 행하는 것이 온전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왜 잘못되었을까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므로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면 그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고 유월절도 지켰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8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따라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은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을까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면서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정신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속에는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율법 곧 새 언약의 절기를 지킬 때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게 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동시에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로 점차 거듭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율법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율법을 마음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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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기회는 주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기회를 잘 포착하고 잡은 사람과, 기회가 다가온 것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지나고 나서야 떠나버린 기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요. 그 둘에게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여러가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하다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통계도 있고, 각종 교회 건물들이 매물로 나와 교인수의 감소를 실감하기도 하는데요.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세태에 교회가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 역시 부패하고 세속화됨으로 더욱 안타까운 상태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읽다가 한 구절에 마음이 쏘옥 빠졌습니다. 그래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글을 올려요.



히브리서 11장 15절~16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성경은 우리의 영혼의 본향(고향)이 하늘나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에 돌아갈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었는데요. 누구든지 우리 영혼의 본향(고향)인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로 '돌아갈 기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늘나라로 돌아갈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영혼의 본향인 하늘나라를 늘 사모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정작 하늘나라를 향한 마음은 얼마나 투자하는지요?


아직 돌아갈 기회는 있습니다. 기회를 놓쳐 후회하는 우리가 될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잘 잡아 저 영원한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에 모두가 함께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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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무례한 언행이 직장에 대한 만족감이나 일의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경영학자인 피어슨과 포라스가 직장인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무례함을 경험한 직장인의 상당수는 조직에 대한 애착 감소, 업무성과 하락,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업무 집중도 저하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가 조직 구성원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조직의 성과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상호존중의 문화는 일하고 싶은 직장 분위기를 만듭니다. 일하기 좋은 직장을 지향하는 회사들의 공통점중 하나는 경영이념이나 핵심가치에 '존중', '배려'라는 문구가 명확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고객을 대할 때 요구되는 관심, 존중, 배려 있는 행동은 구성원 사이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스타벅스사는 '구성원에게 최고의 근무 환경을 제공하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만든다'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보잉(Boeing)사도 '구성원 상호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포시즌 호텔은 '남들이 나를 대우해주길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을 경영이념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성원들의 상호존중과 배려가 조직의 성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존중이란 나와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상호존중의 문화는 삶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일의 결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더욱 풍성한 삶의 결실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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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디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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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에서 지키는 2018년 새언약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간단히 유월절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유월절을 전하면, 어떤 이들은 유월절은 구약의 율법이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을 통해 살펴볼께요.


만일 유월절이 단지 구약의 가르침에 불과하다면, 신약시대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부터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7~19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지키기를 간절히 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5절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신약시대에 지킬 필요가 없는 유월절이라면, 예수님께서 이토록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를 간절히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간절히 원하셔서 유월절을 지키셨다는 것은 유월절이 단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이전에는 유월절을 지켰지만 그 이후에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후에도 사도들은 유월절을 계속 지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8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포함한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지킨다고 하였습니까? 명절 즉 유월절을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주후 57년경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후로도 사도들은 계속해서 유월절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러므로' 한 것은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으므로'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때문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반대로 유월절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으므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에는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본을 따라서 새 언약의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대로 새언약의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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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할 때 이야기가 겉돌거나 서로 같은 입장만 되풀이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상대를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말을 잘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 들어주지 않을 때 생겨납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잘 들어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것을 '경청'이라고 합니다. 경청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청의 가장 하위 단계인 '배우자 경청(Spouse Listening)'입니다.

부부간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배우자 경청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배우자 경청은 다른 것을 하면서 "응", "그래"하며 건성으로 듣거나, "나중에 얘기하자"하는 식으로

상대방의 말을 가로막기까지 하는 유형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수동적 경청(Passive Listening)'입니다.

수동적 경청은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이거나 공감해주지 않고 말하도록 가만히 놓아두는 것입니다.

수동적 경청은 말하는 사람의 대화 의욕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소통과 공감을 가로막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적극적 경청(Active Listening)'입니다.

적극적 경청은 말하는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공감해주는 경청입니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그래서?" 하는 추임새를 넣으면서 듣습니다.

적극적 경청이 이뤄지면 의사소통이 원활해집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경청은 '맥락적 경청(Contextual Listening)'입니다.

상대방의 의도, 감정, 배경처럼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며 듣는 방법이 맥락적 경청입니다.

상대방의 마음까지 헤아리기 때문에 원활한 소통과 공감이 가능해집니다.


친구든 선후배든 호감을 가졌던 사람을 떠올려본다면,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공감해주었던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맥락적 경청으로 화목하고 사랑 넘치는 가정, 즐겁고 웃음 가득한 삶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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